사진
언젠가부터 사진을 뽑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프린터를 사서 직접 사진을 뽑아보고 벽에 붙여 한 눈에 살펴보고 싶다는 욕구가 꿈틀거렸다. 집에서 매일 찍는 사진들은 햇빛이나 시간대에 따라 톤이 달라질 수 밖에 없었는데 그 차이를 한 눈에 담아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가끔 연습삼아 찍는, 조명을 펼쳐 찍은 사진들을 뽑아본다면 원하는 그림에 더 가까워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던 중 2022년 12월 28일 류가헌 갤러리의 <비누> 전시 오프닝에서 구본창 선생님의 어떤 답변을 듣게 되었다. 작업물 때문에 점점 늘어나는 짐들이 고민이라 선생님은 어떻게 정리하시는지, 어느 남자가 물었다. 선생님은 촬영 후에 인쇄까지 해보는 것은 당연한 과정이지만 액자에 담는 일은 신중할 것을 조언했다. 전시를 연다고 하더라도 팔리지 않으면 모두 짐이 되는 것은 본인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전시, 액자 그런 이야기가 오가는 중에 나는 생각했다. 손바닥만한 크기라도 꼭 사진을 뽑아봐야겠다, 라고.
전공자도 실무자도 아닌 나는 왜 그 자리에 앉아 귀를 열고 있었을까. 강릉에서 열린 <탈> 전시에 이어 두번째로 선생님을 찾아간 자리였다. 처음엔 그저 끊임없이 작업을 이어가는 이야기가 궁금했고 점점 선생님이 말하는 방식에 빠져들었다. 편안하고 힘이 있었다. 자유로운 분위기의 대화 속에서 작은 수첩에 적어 내려갈 문장들이 가득했다. 근본없는 사람의 단순한 열정은 그저 원하는 것을 찾아갈 뿐이라고 설명할 수 밖에 없었다.
아카데미- 나의 첫 번째 포트폴리오
그렇게 두 계절이 지났다. 반년동안 회사에서는 쉴 틈 없이 양배추나 마늘같은 것을 스타일링 해왔지만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작업물은 여전히 없었다. 혼자 작업하는 사진들은 고요하게 쌓이다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그러던 중 우연히 후지필름 파티클에서 열리는 강좌가 눈에 들어왔다. 사진 수업이 아닌 그동안 찍은 사진을 모아 포트폴리오를 만들어보는 과정이었다. '여러분의 사진은 고급 두릭스 인화지에 잉크젯 프린트 하고 COSMOS 포트폴리오북에 담아 완성됩니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지만 매주 토요일마다 두시간 반씩 총 다섯번의 강좌를 거쳐 나만의 포트폴리오 한 권을 완성한다면 삼십만원을 기꺼이 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업을 마치고 돌이켜보니 첫번째 수업을 빼고는 자발적인 참여로 이루어지는 워크샵 형태에 가까웠다. 물론 혼자서도 시도해볼 수 있는 작업이라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주 5일을 회사에서 보내는 직장인답게 이러한 이벤트 없이 스스로 약속을 지키기란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런 마음을 말하지 않아도 알겠다는 듯 첫 수업에서 가장 처음 들었던 이야기는 '마음에 안들더라도 마감하는 기술을 익혀보라'는 것이었다. 미루다보니 쌓이기만 하는 것에서 벗어나 하나씩 완성하는 경험이 중요하다고 했다. 그 경험이 필요한 사람들이 황금같은 토요일 오후에 압구정로데오역 앞에 위치한 후지필름 파티클에 모였다.
첫번째 수업은 뉴욕에서 오래 공부하고 사진 관련 책을 낸 박태희 작가님의 특강이었다. 왜 우리는 포트폴리오를 만들고 작업을 하는지 그 목적에 대한 생각해 볼 이야기를 던졌다. 역사적으로 훌륭한 사진 작가들 - 로버트 프랭크Robert frank, 자크 투..Jak Tuggener, 낸 골딘Nan goldin, 다이안 아버스Diane arbus, 필립 퍼키스Philip perkis 의 귀한 사진집들을 직접 가져와서 돌아가며 볼 수 있게 해주었다. 그 사진집들이 얼마나 보물같을지 알 것 같기에 최대한 조심스럽게 펴 보았다. 1940, 50년대. 그 시절 작가들의 순수하고 아름다운 포트폴리오에 대해 들었다.
출판이 되든 안 되든 놓지 않는 희망
사진을 찍은 당사자가 직접 편집까지 해내는 작업
자기만의 시각
3부를 만들어서 한 권은 아버지, 한 권은 다른 이, 한 권은 내가 갖는 순수한 열정
누가 보든 (상관없이) 내가 작업한 것들을 하나로 묶는 과정의 가치
내 의식이 지속되는 방법
꾸준히 작업하는 것
한 권의 포트폴리오가 평생의 주제가 되는 일- '단초', '씨앗'
이런 말들이 수첩을 채웠다. 로버트 프랭크의 <Black white and things> 사진집은 시처럼 수수하고 아름다웠고 초판으로 단 세 권을 내서 귀한 사람들에게 나눠줬다는 대목에서는 할 말을 잃었다. 감동이 깊은 나머지 강사님의 <사진강의노트> 책을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구해 읽었다.
전체 강좌를 이끌어가는 유별남 작가님은 두 번째 수업까지 자신이 찍은 사진을 200장 아래로 뽑아오라는 과제를 냈다. 100장도 괜찮다고 말했다. 가장 작은 크기도 상관없다고. 학생 때 애용했던 찍스를 오랜만에 찾았고 아이디가 기억나지 않아 새로 가입했다.
사진으로 부지런히 남겨두었던 -나무가 보이던 창-
2020년에 독립한 이후로 계속 찍어 온 사진들을 모아 200장을 선별했다. 사진 파일을 더 잘 정리해놓았다면 좋았겠지만 -원본파일>보정파일>블로그 업로드용>인스타그램 업로드용- 으로 나누는 과정이 항상 '일하듯' 깔끔하지 않았기에 외장하드를 전부 살펴봐야했다. 신기한 것은 처음 찍스에서 200장을 주문하고 받아보자 빼놓은 사진이 생각나서 추가로 8장을 더 주문했다는 점이다. 그동안 블로그, 인스타그램에 올리지않고 저장만 해 둔 사진까지도 생생하게 떠올랐다. 새벽에 주문하면 바로 그 날 오후에 도착하는 찍스의 서비스에 진심으로 놀랐다.
두번째 수업에서는 책상에 200장의 사진을 펼친 후 40장을 선정했다. 여기서는 꼭 40장 이라는 장수에는 상관없이 내가 담고 싶은 주제에 맞는 사진을 뽑았다. 그리고 톤에 맞지 않거나 튀는 사진은 덜어냈다. 그럼에도 꼭 넣고 싶은 사진은 다시 담았다. 이렇게 빼고 더해지는 과정을 거치면서 다른 사람들의 작업도 함께 감상했다. 다같이 책상을 돌아가며 각자의 사진의 흐름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날 수업의 과제는 스무장의 사진과 원본 파일을 담은 usb를 가져오는 것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면 벽에 붙여가며 나만의 이야기를 다듬었다.
탈락된 사진도 소중하게 담아 다녔다.
스무장으로 뽑힌 사진은 원본 파일을 담은 usb 와 곱게 포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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