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은 유난히 힘겹게 보냈다. 그러한 까닭은 8월 초에 세상을 등진 윤이가 한동안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유일하게 모든 영상을 지켜봤다고 할 수 있는 제주도에 사는 여린 친구. 감출 것 없이 모든 것들을 내보여주는 그 아이를 보며, 나는 어디까지 솔직해질 수 있을지 스스로 돌아보곤 했다.
항상 내 블로그와 비슷한 마무리라 생각했다. 어려운 현실에 미래는 보이지 않지만 오늘도 나는 힘을 내본다, 는 식의 결말 -결국 스스로에게 힘을 내보이며 하루하루 버티는 삶. 나는 나의 안녕을 간절히 바람과 동시에 그 친구의 빛나는 미래를 꿈꿔왔다. 그리고 매달 부지런히 올라오는 영상들을 빠짐없이 지켜보곤 속으로 응원해왔다. 나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바람이 한결같았을 텐데. 여리고 얇은 끈에게 닿지 못하고 툭, 흩날리고 말았다.
세상에 위, 아래가 있을까?
여름이 시작될 즈음 시작된 고민은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다. 과거에 세웠던 기록만큼 벌이가 좋지 않은 직장을 한없이 낮게만 취급하고 기만하는 어떤 동료를 보며 비슷한 생각을 했다. 과거의 당신은 위에 있고 현재의 당신은 아래에 있는 것처럼 여기는 걸까? 지금 이 순간을 함께하는 사람들의 얼굴까지 찌푸리게 만드는 공기를 나눠마시며 속이 답답했다.
내가 윤이의 영상을 진심으로 좋아했던 이유는 위, 아래로만 나누는 세상 속에서 보기 힘든 순수함때문이었다. 메이저와 마이너, 프로와 아마추어로 구분짓고 판단하던 시대와는 다른 차원의 세상이다. 스물몇 살의 친구가 낡은 집에서 갈 곳 없는 고양이 몇 마리를 돌보며 몸이 불편한 부모님을 위해 밥을 만드는 다큐멘터리. 그 모든 과정은 윤이의 손으로 탄생했다. 작고 소소한 이야기들이 마음속에 큰 울림을 남기는 이유는 윤이의 '순수한 의지'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힘겨운 생활에도 어떻게든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고자 했던 윤이를 존경했다. 텅 빈 눈동자로 바라보는 작은 화면 속에서 누구나 똑같이 욕망하는 것과는 다른 바람들을 함께 응원했다. 휠체어로 편하게 다닐 수 있는 집이, 엄마를 태우고 다닐 수 있는 자동차가, 안정적인 수입이 윤이의 미래에 찾아올 거라 믿었다. 이런 나의 응원과 믿음이 어찌나 굳건했던지 새삼 윤이가 세상을 등지고 나서 알았다.
떠난 윤이의 영상 주변엔 나와 같은 사람들이 맴돈다.
-평안히 쉬세요.
평안. 윤이가 자주 말하던 불안의 반대말.
2주, 3주가 지나고 윤이버셜 채널을 그만 보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 때쯤 멀리서 택배가 도착했다. 몇 달 전, 호주 멜번에서 어렵게 찾아 언니네 집으로 배송시켰던 책이 드디어 나에게 온 것이다. 클레멘타인 데이라고 하는 사람이 코로나를 피해 친구들을 집에 불러 음식을 차려주다가 멋지게 사진을 찍어 레시피북을 냈다. 순수한 의지로 낸 창작물, 거기에 언니가 써준 카드까지. 멀리서 온 귀한 버팀목과 같다.
세상에 존재하는 위아래는 윤이가 있는 그곳과 내가 있는 이곳 뿐이라는 생각으로 살아내려 한다.
'무언갈 지속할 수 있게 하는건
잘하는 내가 아니라
잘하고 싶은 나' 라는
윤이의 말을 가슴에 새기며.
0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