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3일

 

Chinque terre 친퀘테레 2011


지난밤 꿈에 하늘의 신께서 금척을 내리시니

무너진 잔해 위에 새 시대가 피어나는구나

오래된 이운 나무에 새 잎이 돋아나니 

샘이 냇물을 이뤄 바다에 이르리이다

석벽 틈에 미륵에의 기원을 숨겨두드니

일어서기 위해 먼저 무릎을 꿇으라

새벽빛을 보려면 먼저 불을 끄라

어둠이 끝났으니 빛을 향해 돌아서라

이제 조선의 새벽으로 걸어나가리라

-국립중앙박물관 <새 나라 새 미술> 프롤로그



이스탄불 istanbul 2011



문장 속에 산다. 지난주까지 가장 자주 떠올린 문장은 -울지 말고 일어나. 피리를 불어라- 였고 이번 주는 -일어서기 위해 먼저 무릎을 꿇어라- 였다. 쉬는 날 혼자 찾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마주한 문장이었다. 갑자기 필름 카메라를 다시 써보고 싶어 렌즈를 구매하고 필름을 준비했는데 노출계가 고장 난 걸 발견하던 차였다. 마음에 드는 사진으로 일어서기 위해 무릎은 자꾸 꿇린다.


내 손으로 들어온 필름 카메라는 17년 만에 처음으로 새 렌즈를 맞이했다. 꽤 오래 고군분투하며 디지털 카메라고 렌즈고 하나 둘 들여오던 중이었다. 대단하게 쓸 일이 없었던 필름 카메라의 렌즈를 산 것이 이번 여름의 문턱 나에게 일어난 사건이다. 28mm와 58mm 매크로렌즈였다.


매일 출근하는 길목에서 단 사 분 거리에 있는 어느 카메라 수리점을 찾았다. 못 고칠 수도 있다는 진단을 받고 사장님과 짧게 대화를 나누었다. 갑자기 이 렌즈를 왜 샀는지 물으시더니 작은 탁자에 놓인 어느 책을 가리켰다. 좀 가져와보라고. <Advertising photography in japan 5>라는 책을 펼치며 1980년대 필름으로 찍은 광고 사진을 보여주었다. 매크로렌즈란 이런 걸 찍는 것이라고. 바로 그걸 원해서 샀다고 대답하는데 갑자기 그 책이 갖고 싶을 정도로 눈이 돌아갔다. 


새벽빛을 보려면 먼저 불을 끄라고 했나. 나의 니콘 fm2는 오랜 겨울잠으로 이런저런 문제가 쌓인 듯했다. 베터리를 바꾸어도 어두컴컴한 노출계. 전에 찍을 땐 어둡다는 느낌을 못 받았냐는 질문을 받는데 그 전이라는 게 언제인지. 왜 벌써부터 이십 대가 전생처럼 느껴지는지?


스물넷에 떠났던 유럽 여행에서 나는 루믹스 디지털카메라와 니콘 필름 카메라, 후지 폴라로이드 미니까지 세 대를 들고 있었다. 어쩐 일인지 디지털카메라와 아이팟으로 찍은 수만 장의 사진은 뿔뿔이 흩어진 듯한데 필름 열 롤 안팎의 사진들은 뚜렷하다. 아무것도 모르고 노출계에 의지해서 찍었던 날들이다. 단순하고 행복했다. 하루는 디지털, 하루는 필름 카메라를 들고 호스텔을 나섰던 날들. 나는 오랜 여행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나만의 기념일 6월 13일에 다시 필름 카메라를 돌아보게 된 것이다. 


사장님 저 그냥 니콘 f3 살까요?

왜 그냥 고쳐 쓰시지. 


사장님은 자신의 실버 fm2를 가지고 나와 50mm 렌즈를 보여주었다.


사장님 실버 진짜 멋진데요?

왜 나는 블랙이 더 멋진데. 남의 떡이 더 커 보이는 거지.


사장님은 삼각대와 조명을 두고 필름 카메라로 찍어보라고 조언해 주었다. 만약 고쳐진다면 말이다. 카메라를 손에 쥐어준 친구는 장가가고 나와 둘만이 남은 fm2여. 어둠을 끝내려 하니 제발 빛으로 돌아서주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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