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보고싶을 때

 




누군가의 얼굴이 눈빛이 옆모습이 생각날 때도 있지만
유난히 그 웃음이 보고 싶을 때가 있다.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던 몇몇 장면이 문득 떠오르기도 한다. 눈의 주름이나 입을 신경 쓸 사이도 없이 크게 웃었던 순간들이 있었다. 무슨 내용이었는지는 몰라도 눈물이 날 정도로 함께 웃었다는 것 자체가 좋은 기억이다. 그 사람이 웃는 소리를 듣고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던 기억도 있다. 아이처럼 까르륵 넘어가는 순수한 웃음이 내 마음도 간지럽힐 때. 몸을 움직여 도대체 무슨 일인지 알아봐야하는 그 웃음.

웃는 얼굴이 또 보고싶어 한 번 더 만나야겠다는 결심이 섰던 데이트가 있었다면, 소리만으로 날 웃게 한 기억은 대부분 엄마다.
엄마는 티비를 보다가도 이야기를 하다가도 크게 잘도 웃었다. 엄마가 먼저 웃으면 나도 따라 웃고, 뒤로 넘어가게 웃는 모습에 멈추지 않고 서로를 웃겼다. 

그러던 엄마는 언젠가부터 나를 마치 안개 낀 풍경처럼 바라본다. 앞길이 아득해 보인다는 눈빛이다. 독립 후 엄마의 반찬은 종종 집을 찾을 때 조금씩 챙겨오는 김치나 명절 음식 말고는 특별히 없었다. 내가 알아서 잘 해먹는다는 이유였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가 친구를 만나러 서울에 나온다는 핑계로 두릅, 미나리, 머위대 들깨 볶음, 할머니표 식혜를 싸들고 왔다. 이미 냉장고엔 엄마의 파김치와 오이김치, 물김치가 있었기에 할머니표 파김치는 도로 가져가야 했다. 엄마는 내가 부끄러워질 이야기를 덤덤하게 털어놓고 떠났다.



내가 부끄러운 건 어려서 그렇다 쳐도 엄마가 부끄러워질 일은 만들고 싶지 않다. 하지만 모든 일이 그렇듯. 원하는 일에는 시간이 필요한데 그 시간은 우릴 기다려주지 않고 흘러간다는 게 문제다. 기다려준다면 안개가 걷힐까. 아마 엄마 또한 날 부끄럽게 만들고 싶진 않아 참고 또 참았을 것이다.

국제갤러리에서 보았던 이기봉 작가의 그림이 떠올라 머리맡에 붙였다. 우리 가족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안개를 마주했던 적이 딱 두 번 있다. 큰 딸의 대학 졸업을 기념하기 위해 큰 마음먹고 찾았던 시드니 블루마운틴에서 그랬고 작년 정선에서 또 그랬다. 해 뜬 날의 풍경을 아는 몇몇은 안타까움에 말을 잃었다. 짙은, 뽀얀, 포근한, 자욱이. 안개를 표현하는 말들의 반대되는 쪽에는 '뚜렷이'가 있다. 

안개가 자욱이 피어난 풍경은 마치 꿈 속처럼 신비롭다. 상상하는 숲 그 너머의 지평선이 곧 드러날 듯 드러나지 않기에 쉬이 자리를 떠나지 못한다. 해가 뜨기를, 바람이 불기를 기다려보기도 한다. 머무르거나 기다리거나 떠나거나. 안개 앞에서 할 수 있는 건 또 무엇이 있을지 생각하다가 또 시간을 보낸다. 

바쁜 한 주를 보내고 냉장고에서 시름시름 맛을 잃어가는 삼겹살을 꺼내 보글보글 김치찜을 끓였다. 나머지는 모두 엄마표 반찬으로 상을 차린다. 그마저도 차릴 힘이 없는 다음 날 아침은 계란에 밥을 대충 볶아 김치찜과 먹었다. 후식은 아흔둘의 할머니가 만들어주신 식혜를 마신다. 다음 날은 불고기와 두릅을 함께 먹었다. 김치찜이 제일 맛있어질 때쯤 미나리와 계란을 넣은 너구리 우동 한마리에 찬밥을 함께 비웠다.

할머니와 엄마는 인생의 맑은 날을 이미 보았을까. 나는 본 적도 없는 숲과 지평선을 경험했을까. 
나는 뿌옇기만 한 앞 날을 그저 아름답다- 감탄하며 머물렀던 걸까. 젊은이라서? 
엄마를 웃게 하는 방법을 나는 선명하게 알아차렸을까.






















0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