슴슴하게 스며드는 문장들



우편함에 반가운 봉투가 꽂혀있는 모습을 몇 년 만에 보았다. 잊을만하면 찾아오는 성북동 소식지 말고는 우편함의 역할이 사라진지 꽤 오래되었다. 나는 일을 하다가 만난 한 친구와의 대화를 짧게 적어냈다가 마스다 미리 동창회의 동창생으로 뽑혔다. 

이제 이십 대 후반인 그 친구와는 내 여동생과 동갑인데다가 딸 셋 중 막내라는 엄청난 공통점을 발견하고는 짧은 시간에 마음을 열어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서울에 올라와 언니들과 함께 살고 있지만 자신은 서른이 지나면 무조건 시골로 내려가고 싶다던 그 친구. 지금도 주말이면 산이나 들로 떠나 자연 속에 있는 게 마음이 편하다고 말했다. 나는 서른 중반이 되어서야 사람이 나오지 않는 다큐멘터리 -동물이나 광야가 나오는 그런-나 '나는 자연인이다'를 틀어놓던 아빠를 이해하게 되었던 것에 반해 이른 나이에 자신이 원하는 환경을 빠르게 찾아낸 그 친구가 신기했다. 그리고 이렇게 대답했다. '완전 마스다 미리의 주말엔 숲으로 같네요!' 
그 친구는 처음 들어보았다며 바로 책을 주문하는 행동력을 보여주었다. 이 에피소드로 뽑힌 동창생의 특권은 새로 출시될 신작 <오늘을 산다> 시리즈 두 권을 살짝 맛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 두 권은 <누구나의 일생>, <행복은 누구나 가질 수 있다> 로 제목만으로 눈물 짓게 하는 마스다 미리 다움을 보여준다.

나에게 마스다 미리를 처음 알려준 사람은 유일하게 남은 나의 초등학교 동창 친구였다. 피부가 뒤집어지도록 스트레스를 받고 어디로 가야 할 지 모르던 이십 대 후반이었다. 단순한 그림에 그림만큼 간단한 문장들. 몇 마디 되지 않는 말들에도 내가 듣고 싶은 이야기는 가득해서 크게 위로받았다. 지금 이대로 괜찮은 걸까, 아무래도 싫은 사람, 나답게 살고 있습니다, 주말엔 숲으로, 결혼하지 않아도 괜찮을까, 너의 곁에서, 차의 시간, 오늘의 인생. 내가 읽은 마스다 미리의 책들이다.

잊을 수 없는 내용들이 몇 있는데 그중 인생의 좌우명이 된 문장은 <주말엔 숲으로>에서 카약을 타는 장면에서 나온다. 배가 제대로 나아가지 않는다고, 가려고 하는 방향에서 틀어져 버린다는 친구의 말에 들려오는 대답
-손 끝만 보지 말고 가고 싶은 곳을 보면서 저으면 그곳을 다가갈 수 있어-
무슨 일이 닥치더라도 이 문장 하나면 나는 괜찮겠구나 싶었다. 실제로 카약을 타본 적이 없었던 나는 이 문장을 몸소 체험하기 위해 제주도 쇠소깍을 찾기도 했는데, 생각보다 물의 높이와 내가 너무 가까워서 손끝도 가고 싶은 곳도 못 본 채 삼십분 정도 패닉에 빠지고 말았다. 배를 돌려줘야 하는 시간이 다가오자 주변이 보이고 노를 저어볼 수 있게 되었다. 지체시간이 길고 인생의 속도가 느릴 수 있다는 나만의 특수함이 추가되었지만 아직도 잊을 수 없는 문장으로 남아있다. 

<아무래도 싫은 사람>은 인간관계가 어렵게 느껴질 때마다 혼자 읊조리는 고유명사가 될 정도다. '그래. 아무리 노력해도 싫은 사람이 있는 법이고 그것도 괜찮다고 말했었지.' 하며. 그렇게 십이 년이 흘렀다. 

신작 <행복은 누구나 가질 수 있다>는 마흔 살의 히토미가 등장한다. 14살 연하의 후배와 '가볍게 한 잔'을 하고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기도 하며 충실하게 살아가는 중이다. 금요일 밤, 가족들이 잠든 고요한 집으로 돌아가 아버지와 인사를 나누는 장면이 나온다. 문득 나이 든 아버지가 내는 화장실 물소리에 막연한 쓸쓸함을 달래본다는 문장. 아버지는 '일찍 자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진다. 세월을 마주하는 미용실의 거울 앞에서도, 고요한 금요일 밤의 집에서도 히토미는 담담해 보인다. 아직 읽지 못한 목차 속의 소제목들은 꼭 전체를 읽고 싶어지도록 만든다. ('애인이 있는 가을' 이나 '허무함은 어디서 오는 걸까'와 같은)

<누구나의 일생>은 도넛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집으로 돌아가서는 자리에 앉아 만화를 그리는 나쓰코의 이야기다. 이야기 말미에는 나쓰코가 그린 '만화 속 만화'가 등장하는데 일터에서 있었던 일들과 집에서 아버지와 나눈 슴슴한 대화가 재구성되는 식이다. 나는 매미가 몸을 뒤집은 채로 죽는 다는 사실과 매미는 눈이 등에 있다는 사실도 처음 알게 되었다. 매미는 과연 하늘을 보고 죽는 것일까 흙을 보고 죽는 것일까, 어느 쪽이 좋을까-까지 이야기하는 작가의 시선이 너무 세밀하고도 소중했다.

쉬는 날 찾은 카페에서 아껴두었던 마지막 에피소드 '과일 샌드위치'를 읽는데 주변의 풍경들이 마스다 미리의 이야기처럼 다가왔다. 아파트 단지 속 높게 뻗은 나무와 주차되어 있는 캠핑카. 옆자리에서 슬며시 들려오는 아주머니들의 대화. 꽤나 디테일해서 놀라운 아이들을 대학 보내는 고민들. 어느덧 햇빛이 타오르듯 낮게 지고 노란 버스가 동네를 도는 평범한 오후의 시간. 마스다 미리의 이야기는 이토록 나의 일상과 가까이에서 살아 숨 쉬듯 느껴진다. 

"기대도 없이 절망도 없이 오늘을 산다." 
책자 뒤에 나와있는 문장과 줄 이어폰 일러스트는 시간이 흘러감에도 모든 것은 괜찮고 내가 좋아하는 것은 여전히 남아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많지는 않지만 몇 번의 서평단 경험을 했다. 그중 출판사 이름처럼 진행 방식이 가장 편안하고 따뜻했다. <새의 노래> '쓰고 읽는 사람들이 부르는 이야기' 란다. 









옆 동네 길음동에 새로 문을 연 카페 브론즈에서 











카약을 체험하러 떠났던 쇠소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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