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일 하루 전날, 나는 윌리엄소노마에서 오십퍼센트 할인 행사를 지나치지 못하고 레몬과 라임을 쉽게 짜낼 수 있는 작은 도구를 샀다. 나의 작은 주방은 이렇게 도구들이 하나둘 모여 여백이 없는 상태. 그릇과 젓가락도 꺼낼 수 없이 많다. 시도할 수 없는 요리는 없고 사진을 찍을 수 있는 배경도 충분하다.
생전 처음 마주한 골목길에 반해 한참을 떠돌다 공사 중인 어느 가게를 만났다. 막 더워지기 시작한 유월 육일 현충일이었다. 매직으로 무심하게 쓰여있던 간판이 마음에 들었고 곳곳에 붙여진 마스킹 테이프 위 글씨체, 그림이 귀여웠다. 단번에 느껴지는 청년의 향기. 작은 오븐과 칼 몇 개, 길게 뻗은 스텐리스 아일랜드 상판이 전부인 공간에 본능적으로 이끌렸다. 젊은 청년이 직접 손으로 한 땀 한 땀 다듬고 있다는 걸 단번에 알아차렸다.
성북동 언덕만큼 가파른 길을 올라야만 발견할 수 있는 위치가 날 사로잡았는지도 모른다. 성북동에서 낙산공원을 거쳐 꽤 오래 걷다가 우연히 발견한 골목이라 더 그렇게 느껴졌다. 충신동이라고 하는 동네는 동대문과 가까워서 미싱을 돌리는 작업실이 꽤 많아 보였다. 길가엔 오토바이가 자주 보였고 차는 거의 다니지 않았다. 오래된 집들이 빽빽하게 골목을 채워 순간 친퀘테레가 떠오르기도 했다. 달팽이길 이라 불리는 장소를 마주했을 때는 영화의 한 장면 같아 넋을 놓고 서서 바라보았다.
곧 찾아온 생일에 thick seoul에서 저녁식사를 하기로 했다. 가만히 서있기만 해도 볼이 뜨겁고 몸이 축축해지는 날이었다. 버스에서 내려 19분 동안 걸어 올라야만 도착하는 그 모퉁이. 곳곳에 정성스럽게 꾸며진 화단을 구경하며 땀을 닦았다. 이곳에 전부 사람들이 살고 있는 건가 의심스러울 때 쯤 조금 열린 문 사이로 사람들이 하나둘 보였다.
예상대로 젊은 셰프가 우릴 반겼다. 공사 중일 때와 비슷한 간단한 주방. 간단한 도구. 꺼내기 쉬울 만큼만 쌓여있는 그릇 몇 개, 인덕션에 팬 몇 개. 높은 천장과 벽의 여백으로 눈이 맑아지는 공간에 앉아 새송이버섯, 오리다리 콩피, 새우 게 파스타를 차가운 화이트 와인과 함께 천천히 먹었다. 모든 음식이 더할 것 없이 완벽했지만 특히 새우 게 파스타에 감탄했다. 맛있는 음식을 위해 필요한 건 실력뿐이라는 걸 알려주는 듯했다.
문득 모든 걸 갖추고 무언가를 시작한다는 건 청년답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필요한건 이미 전부 갖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각자의 씨앗은 이미 가장 중요한 곳에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그것을 뿌리내리고 햇빛을 향해 솟구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을 원하는지 아는 것과 시작하는 용기를 갖는 것 뿐.
그런 생각을 하며 나라에서 인정하는 청년의 선을 벗어나 새로운 나이로 접어들었다. 이 작지만 이미 충분한 바는 밤에 더 빛났다. 골목을 빠져나와 달팽이길을 지나고 신비로운 성곽길을 걸었다. 퇴근길 새우 게 파스타를 자주 먹을 수 있게 해주세요. 어느 할머니의 화단처럼 부지런히 꽃을 키우는 사람이 될게요. 보름달을 바라보며 소원이기도 결심이기도 하는 문장들을 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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