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재 가는 길, 삼포 해변
이직을 결정했다. 어느 날과 다를 바 없을 하루하루가 단지 끝이 정해져있다는 이유만으로 다신 못 올 귀중한 시간으로 남겨졌다. 마지막 달력이 넘어가는 것보다 매일 9시간을 함께 했던 사람들과 멀어지는 것을 받아들이는 데 더 많은 준비가 필요했다. 삼 년이 조금 안되는 세월 동안 온 마음을 다 바쳤던 곳을 떠나며 정신을 잡아 줄 무엇이 간절했다.
우선 도자기 수업을 신청하고 오래 미뤄왔던 조주기능사 필기 시험을 등록했다. 토요일 아침에 일어나 빨래를 돌리거나 집을 가볍게 청소하고, 느지막이 효자동의 어느 도자기 작업실로 찾아갔다. 두 시간 동안 핸드폰과 세상에서 멀리 떨어져 손끝에 닿은 흙을 바라봤다. 생각만큼 모양이 잡히지 않았지만 머릿속이 비워지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해졌다. 조주기능사 문제집은 지금껏 내가 해왔던 시험공부 중 가장 재미있게 느껴졌다.
마지막으로 나에게 딱 삼일의 자유시간이 주어졌을 때, 어디론가 떠날 것을 다짐했다. 가장 하고 싶은 것은 피로를 씻어내는 일이었다.
얼굴에 묻은 피로를 씻어낼 수 있을까
누군가 나에게 평생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물어본다면 '피로 없는 얼굴'이라 대답하겠다. 오년 전부터 내린 답이다. 몸과 마음이 부드러워질 수 있는 시간을 보내며 평안한 얼굴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축복이다. 그것은 가벼운 운동 또는 와인을 마시거나 목욕을 하는 것 일수도, 수영을 하고 조용히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는 시간일수도 있다.
이십대 초반의 어린 나이부터 마사지를 받던 친구가 나의 생일을 맞이해 1회권을 선물했던 기억이 있다. 친구는 나에게 호사를 누리게 해주고 싶다고 말했다. 이미 직장인으로 바쁘게 살고 있던 친구에게 그 한 시간은 큰 위로였을 것이다. 그리고 더 어린 시절, 햇빛이 드는 아파트에서 어린 동생이 태어나 아장아장 기어다니던 그 시절에도 비슷한 기억이 있다. 엄마와 친하게 지내는 이웃집 아주머니 몇 명이 거실에 모여 돌아가며 마사지를 받았다. 빛나던 엄마의 얼굴과 기분좋은 마사지크림의 향기. 세월이 지나 달라진 환경 속에서 그때의 기억이 더 반짝거린다. 나와 나의 가족, 친구들의 얼굴에 피로를 덜어낼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나는 무엇이라도 해내고 싶다.
그런 희망을 그리는 젊은이는 짧은 여행을 더욱 갈망한다. 수영, 사우나, 와인, 책, 음악, 사색- 이런 것들에 둘러싸인 단 하루를 원한다. 푹 자고 일어난 어린 아이의 얼굴처럼 그늘없이 밝기만 한 얼굴이 되어보길 바란다.
사우나, 온천탕 그리고 '나만의 작은 정원' 가져보기
우연히 서로재를 발견했다. 공기마저 차분한 곳. 새벽녘 풀잎에 맺힌 이슬을 맞이할 수 있는 곳. 차와 입욕, 향을 경험할 수 있다는 설명과 차생활에서 비롯된 '채움'과 '비움'으로 이름지어진 일곱개의 공간까지. 단정한 사이트에서 몇 자 읽어 내려가다가 단숨에 마음을 빼앗겨버렸다. 채움과 비움의 모든 호실은 개별 정원과 욕탕을 품고 있었다. 여기에 핀란드식 사우나가 더해진 비움4 공간을 예약할 수 있었고 딱 하루 머무르게 되었다.
서로재를 찾아 들어가기 바로 전, 우연히 삼포해변을 발견했다. 서로재를 소개하는 글에서 보았던 '활기찬 바다의 환대'를 받는 순간이었다. 해가 떨어지기 전 눈부시게 부서지는 파도와 새들의 날갯짓을 카메라에 담아내며 눈 위를 뽀드득 걸어나갔다. 거침없는 파도와 새들의 움직임을 바라보니 스스로가 눈 밭에 흩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큰 길에서 작은 마을로 들어선지 얼마 되지않아 서로재에 닿았다.
해가 저무는 저녁부터 별이 내리는 밤, 곳곳의 틈을 채우며 빛을 그리던 아침까지.
서로재에서 보낸 시간동안 나에게 큰 위로가 된 건 작은 정원이었다. 포근하게 눈이 덮인, 특히 돌 위에 쌓인 눈은 바라보기만 해도 마음이 차분해졌다. 도착하자마자 챙겨주신 따뜻한 차를 마시며 생각했다. 정원의 눈은 밟지 않고 그대로 바라만 보기로.
말랑해진 몸으로 의자에 앉아 챙겨간 화이트와인과 선물로 주신 와인을 차례로 마셨다. 음악을 들으며 메리 올리버의 기러기를 읽었다. 밤의 어둠속에서 반짝이는 정원을 바라보며 읽는 시 구절은 마음 깊숙이 내려앉았다. 문을 열어 정원을 들여다보며 찬 공기를 자주 마셨다. 이렇게 작고 비어있는 정원에 마음을 한없이 기댈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깊은 잠에서 깨어난 그 찰나, 새벽녘의 하늘이 눈 앞에 펼쳐진다. 멀리 보이는 산이 웅장하게 주변을 감싸고 맑은 소리를 내는 새가 정원에 잠시 머무르다 떠난다. 수수께끼처럼 숨어있는 집 안 곳곳의 틈으로 햇빛이 스며들어 벽에 떨어진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누룽지밥을 -역시 정원을 바라보며 맛있게 먹는다. 잠시 나선 산책길에 서로재를 지키는 나무와 인사한다. 멀리서 바라보니 점잖게 자리잡은 서로재가 산과 닮아있다. 돌아와 준비된 다기로 차를 내려마신다. 이제는 나만의 작은 정원을 떠나야 할 시간.
떠날 때 챙겨주신 작은 솔방울을 달걀처럼 조심히 안고왔다. 침대 위에 놓여져있던 작고 향기로운 솔방울이 떠올라 자주 킁킁거린다. 내 이름이 쓰인 카드와 함께 나란히 놓고 자주 들여다본다. 그리고 떠올린다. 문 밖을 지키던 큰 나무와 늦은 밤까지 마음을 나누던 작은 정원을. 씻어내고 담아온 모든 풍경들을 마음 속에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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