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수원에서
마종기
시끄럽고 뜨거운 한철을 보내고
뒤돌아본 결실의 과수원에서
사과나무 한 그루가 내게 말했다.
오랜 세월 지나가도 그 목소리는
내 귀에 깊이 남아 자주 생각난다.
ㅡ나는 너무 많은 것을 그냥 받았다.
땅은 내게 많은 것을 그냥 주었다.
봄에는 젊고 싱싱하게 힘을 주었고
여름에는 엄청난 꽃과 향기의 춤,
밤낮없는 환상의 축제를 즐겼다.
이제 가지에 달린 열매를 너에게 준다.
남에게 줄 수 있는 이 기쁨도 그냥 받은 것,
땅에서, 하늘에서, 주위의 모두에게서
나는 너무 많은 것을 그냥 받았다.
ㅡ내 몸의 열매를 다 너에게 주어
내가 다시 가난하고 가벼워지면
미미하고 귀한 사연도 밝게 보이겠지.
그 감격이 내 몸을 맑게 씻어주겠지.
열매는 즐거움이 되고, 남은 씨 땅에 지면
수많은 내 생명이 다시 살아나는구나.
주는 것이 바로 사는 길이 되는구나.
오랜 세월 지나가도 그 목소리는
내 귀에 깊이 남아 자주 생각나기를.
11월의 발길
마종기
여름의 신열을 내리려고
나무는 한 달째 잎을 털어내고
며칠째 계속 해열제까지 써도
큰 서리 내리기 전, 가지를
다 비우기는 힘들겠다.
그래도 잎이 대강 떠난 나무,
눈치껏 많은 빈자리에 아우성
감들이 찾아와 매달렸다.
늘 그랬다. 누군가 떠나야
남아있는 발길이 쉽다.
공중에 떠다니는 미풍까지
감의 모든 틈새를 채우고 있다.
감꽃이 지고부터는 내내
그늘에 숨어서 가는 숨 쉬며
떫은 세상의 맛을
달래고 어루만져주던 손,
씻고 닦아주던 하늘의 손.
추워야 단맛이 들고
며칠은 하늘이 높아야
감색이 더 환해진다는데
단맛과 색이 살고 있다는 곳,
가을이 새끼를 친다는 나라로
서리 헤치며 길 떠나는
평생을 달고 고왔던 내 친구.
올해는 그 정든 발소리까지
흥이 나는 듯 장단이 맞네.
담담한 저녁녘의 11월이 떠나고
잘 자란 감이 나무와 이별하면
우리들 나이에는 단맛이 들겠지.
한 목숨의 순결처럼 말없이
먼저 떠난 하늘에서는 해가 지겠네.
나무가 있는 풍경
마종기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네 옆에 있다.
흐린 아침 미사중에 들은 한 구절이
창백한 나라에서 내리는 성긴 눈발이 되어
옷깃 여미고 주위를 살피게 하네요.
누구요? 안 보이는 것은 아직도 안 보이고
잎과 열매 다 잃은 백양나무 하나가 울고 있습니다.
먼지 묻은 하느님의 사진을 닦고 있는 나무,
그래도 눈물은 영혼의 부동액이라구요?
눈물이 없으면 우리는 다 얼어버린다구요?
내가 몰입했던 단단한 뼈의 성문 열리고
울음 그치고 일어서는 내 백양나무 하나.
집 안의 초록과 집 앞의 나무가 다름 없을 때
1월에 이 집을 처음 보러 왔을 때 -나무가 참 잘 보이네요. 하고 나도 모르게 기쁜 속마음을 드러내자 부동산 아주머니는 긴 설명은 필요 없다는 듯 -은행나무. 가을에 얼마나 예쁜지. 라고 짧게 말했다.
집 안은 공사 중이라 싱크대도 없었고 가을엔 얼마나 예쁜지 모를 그 나무는 나뭇가지뿐이었지만 집을 계약한 건 분명히 풍경에 반해서였다. 늦은 봄, 여전히 나무가 앙상할 때 조금 불안해지기도 했다. 혹시 사기를 당한 건 아닐까? 저 나무는 살아있는 걸까? 하는. 천천히 잎이 돋기 시작하고 까치가 재잘재잘 울어댈 때 조금씩 안도할 수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가을이 찾아왔다.
집 안의 초록과 집 앞의 나무가 다름 없을 때 부터 노란 은행잎이 창문을 가득 채울 때까지.
새벽에 잠시 잠에서 깼을 때, 커피를 마시고 빨래를 널다가도 부지런히 사진을 남겨두었다.
특히 주말이면 풍경에 감사하며 가을다운 시간을 보냈다.
경동시장에서 사 온 홍시는 매일 하나씩 아껴먹었고 모과는 테이블 위에 그대로 올려두었다.
또 집에서 즐겨 '마시는' 순위가 조금 바뀌었는데, 와인과 커피가 특히 더 맛있어지고 거기에 더해지는 간단한 안주와 디저트가 더없이 소중했다.(와인-커피-차-가끔 맥주 순)
두꺼운 책이 술술 잘 읽히고 듣고 싶은 음악도 늘어나는 계절.
그리고 집 안 곳곳을 채우는 온기.
추석 때 선물 받은 참기름, 대구에서 온 은은한 향초, 실버스푼에서 어느 날 깜짝으로 보내주신 꽃까지.
감사한 마음과 힘든 마음을 오가며 감당해낼 때 어김없이 바람이 세차게 불기 시작했고 곧 가을비가 내렸다. 위로가 필요할 때면 꺼내보는 마종기 시인의 시가 또 새롭게 읽혀 놀라웠다. 비를 타고 속절없이 떨어지는 은행잎도 놀랍기는 마찬가지. 비 내리는 소리에 잠을 설치고 다음날 일어나니 창밖 풍경은 지난 겨울처럼 바뀌어있었다. 밤이면 다시 멀리 보이는 불빛이 별처럼 빛났다.
4 Comments
눈길과 손길 가는 모든 곳이 아름답구만 헿헿
ReplyDelete따뜻한 댓글은 큰 힘이 됩니다 하트
Delete드디어 로그인을 하여 댓글을 쓸 수 있게 되었어! 내 게으름으로 비번을 못찾았었거든
ReplyDelete여기서 사진과 글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참 편안해지게 하는데 주인을 닮았네에
마종기 시 참 좋다 네 덕에 마종기 시를 읽어보게 됐던 기억이 있네 책도 그렇고
감사할 수 있는 그 마음이 좋다
로그인까지 해주다니 따숩네요 하트
Delete마종기 시인은 최근에 새 시집을 내셨더라구!
편안한 사진 또 보러오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