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있는 그런 처음



/ 이사

아침부터 눈이 내렸다. 
누가 보더라도 -눈 참 예쁘게 내린다. 라고 할 만한 눈이었다. 스노우볼을 뒤집어 놓았다가 다시 제자리에 놓은 것처럼 천천히 조용하게. 눈은 옆으로도 아래로도 내리면서 집 앞 나무에 금방 쌓였다. 침묵같은 눈 내리는 소리를 깨고 엄마는 유난히 말이 많았다. 눈이 너무 내린다. 이사를 미뤄야 된다. 트럭이 언덕을 오를 수는 있을까 등등 걱정을 늘어놓았는데, 이사아저씨가 도착하기 전까지 눈은 세 바퀴정도 내렸다 그쳤다를 반복했다. 
짐을 옮길 때 극에 달하며 이사아저씨를 괴롭히던 눈은 트럭에 모든 짐을 꽁꽁 고정시키자 그쳤다. 새 집에 도착했을 때 멀리 보이는 산 풍경은 선명하고 깨끗했다. 짐을 무사히 안착시킨 후, 저녁을 먹고 집으로 올라가는 길에 다시 눈이 예쁘게 내렸다. 기형도의 <램프와 빵> 시가 하루종일 떠올랐다. 
고맙습니다. 겨울은 언제나 저희들을 겸손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라는.

빈 방을 나올 때, 짐과 함께 동네를 출발할 때 어렴풋이 몇번의 졸업식과 이사들이 떠올랐다. 나는 최대한 좋은 단어들만 떠올리려 애썼고 윤상의 <이사> 가사를 속으로 흥얼거렸다. 


축하인지 겸손해지라는 메세지인지 헷갈렸던 날씨  


무사-히 지나간 날


이사-도착

/ 살림살이

이사 전 다이어리에 <살림살이 구입 리스트>를 적어놓았다. 가장 급한 냉장고, 세탁기부터 냄비, 후라이팬, 도마, 주전자, 헤어드라이기, 빨래세제, 빨래대, 다리미 .. 까지 적다가 필요한 모든걸 적을 수 없다는걸 깨달았다. 문득 시드니에서 언니와 생활했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 많은게 부족했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어느정도 언니가 준비해 놓은 살림살이었던 것이다. 작은 것 하나부터 채우는 일이 당황스러운 한편 꽤 재밌게도 느껴졌다. 급할 것도 없으니 아무거나 들이지말고 마음에 드는 물건만 사기로 다짐했다. 그렇게 예상 금액을 뛰어넘는 냉장고와 세탁기, 스피커부터 샀다. 
이사 다음날 퇴근길 제일 먼저 산 살림살이는 화장실용 슬리퍼와 고무장갑, 빨래망이다. 생협에 회원 가입을 하고 딸기, 가지, 애호박, 계란을 사고 집 앞 빵집에서 바게트를 사서 언덕을 올라왔다. 그동안 부지런히 모아온 그릇, 컵과 마음먹고 장만해놓은 칼, 냄비가 든든하게 부엌을 채웠지만 그 외에 필요한건 그것들을 훨씬 뛰어넘었다. 아직 부엌 가위가 없다. 주전자도 없다. 전기밥솥과 전기포트, 전자렌지는 개인적으로 싫어해서 놓지 않기로했다. 느리지만 하나씩 채워지는 것이 기분이 좋다. 


나의 소중한 냉장고에 아끼는 사진을 붙여주었다. 

/ 모든 것이 처음인 날들  

나의 작고 귀여운 냄비에 처음으로 지어본 냄비밥, 처음으로 찍어본 커피내리는 영상, 처음 편집하고 넣어본 자막, 처음 상이라는 것이 생겼던 날(8살 때 골랐던 책상 상판을 기어코 가져왔다), 처음 이사 선물을 받던 날, 집 안에 처음 꽃이 생겼던 날, 처음 엄마집에 가던 날, 처음 들인 허브 그리고 처음으로 가본 동네 산책, 길상사.   
누구에게나 있는 그런 처음이지만 한번 뿐이라 기념적인 날들이 지나고 어느새 첫 월세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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