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좋아하는 마음을 나도 모르는 때가 찾아온다.
어떤 세계에 반해 흠뻑 빠져드는 시작점에는 초심자에게 찾아드는 행운처럼 몰입의 시간이 주어진다. 흔들릴 틈이 없다. 그저 시작하기 바쁘다. 흉내라도 내고 싶으니까. 어떤 수업에서 처음 찍은 사진 만장은 휴지통에 버리라는 유명한 말을 들었다. 모르는 것 투성이라 버려질 만 장을 찍을 때 꽤 답답할 테지만, 가장 행복한 시절이라고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계절이 지난다. 떨어지는 순간까지 찬란한 벚꽃. 여름의 싱그러운 초록과 파도는 모래알처럼 주머니에 담아 가고 싶을 정도다. 단풍은 깊어진 가을빛에 물들어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고. 새하얀 눈이 조용히 내릴 때 ㅡ 삶에 쉼표가 찍힌다. 차가운 눈밭 위로 노오란 가로등 불이 비치는 풍경. 더 필요한 게 없는 그런 순간을 겪는다.
자연의 주기가 몇 바퀴를 도는 동안 어떤 사람을 만난다. 새로운 장소를 마주하기도 한다. 나를 자극하는 부분에 저절로 존경하는 마음이 들기도 하고 자신이 초라해지기도, 갑자기 모든 걸 그만두고 싶어질 수도 있다. 처음의 순수했던 마음은 온데간데없어진 채. 나도 내 마음을 모르는 때가 갑자기 눈앞에 쿵 하고 떨어진다.
그러나 한 명. 딱 한 명이 날 지켜보고 있을 때. 날 진심으로 응원할 때, 다음을 기대하고 있다고 말해줄 때. 그만두려고 했던 마음 역시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나조차도 나를 잃었을 때는 그 한 명이 나를 살린다. 잘 하고 싶었던 넘치던 마음은 계속 이어가고 싶은 단단한 마음으로 바뀐다. 왜 하느냐에 대한 질문에 ‘그저 좋아서’였던 대답은 ‘지켜봐 주는 사람이 있어서’가 더해진다. 그렇게 새로운 계절이 다시 시작된다.
사람이 떠나고
장소가 사라져도.
삶은 계속 이어진다.
ㅡ도쿄에서 서울로 돌아오자마자 영화 <룩백>을 보고
工芸の本棚図(공예의 책가도)
Shelves of Korean Craft & Life
미나토구 시로가네 4-7-10
시로카네다이역에서 빠져나와 작은 제과점 하나, 약국 하나를 지난다. 왼쪽 모퉁이로 꺾으면 조용한 주택 단지가 시작된다. 우주선 형태의 아파트와 층마다 숲처럼 테라스를 가꾼 맨션에 놀라 고개를 올려 걷다 보면 끝없는 담장이 펼쳐진다. 거대한 나무가 우거진 저택이 도대체 무엇인가 하고 지도를 들여다보니 세이코 창립자의 집이었다고 한다. 대저택의 문을 바라보다 왼쪽 골목으로 들어서면 곧 야에카YAECA 홈스토어에 도착한다.
삐걱거리는 문을 열면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보인다. 자연스럽게 몸이 오른쪽으로 향하고, 거실로 통하는 길에서 다가오는 직원과 인사한다. 그 옆엔 커다란 나무 테이블이 하나 있는데 계산대라기보다 앉아서 글을 써야할 것 같은 분위기다. 낮은 조도의 조명과 간결해보이는 스위치들. 직원들은 아마도 -월WOL 라는 곳에서 한국의 공예품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라는 식의 간단한 설명을 하고 필요할 경우에만 말을 더했다. 흘러나오는 음악은 피아노 솔로, 자연스러운 엠비언트 음악ㅡ 특히 비 오는 날 듣고 있으면 우주로 떠오를 듯한 곡들이 몇 바퀴를 돌았다. 스피커가 놓인 곳은 마지막 날까지 찾지 못했다.
거실 벽면엔 커다란 장이 있고 테이블은 딱 하나. 놀랍게도 카페가 운영되고 있다. 손님이 앉을 수 있는 자리는 여섯이다. 거실의 한쪽은 데크가 깔린 정원으로 통해 있어 유리문을 열고 나갈 수 있다. 류이치 사카모토가 어릴 적 쳤던 피아노와 돌로 된 의자 세 개가 마주 보고 있다. 낡고 오래된 유리창, 창틀, 창을 타고 자라는 식물, 피아노를 둘러싼 나무, 위를 향하면 보이는 2층의 창문.. 어느 곳을 둘러보아도 조용하고 비어있는 정원. 비가 오면 빗소리가 진동하고 맑은 날엔 새가 노래하는 소리,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로 가득하다.
계단을 올라 2층으로 향하면 나무로 뒤덮인 방이 하나, 주얼리가 있는 또다른 방이 하나 보인다. 창문으로 둘러싸인 넓은 공간에는 드디어 야에카 옷이 나타난다. 핀란드식 사우나를 떠올리게 하는 나무로 뒤덮인 방은 류이치 사카모토가 보던 책이 놓여있고 의자가 하나, 벤치가 하나 있다. 거의 누울 수 있는 나무 의자에 앉으면 지붕과 하늘이 담긴 창문을 마주한다. 산소 호흡기를 닮은 아카마츠 네로 작가의 유리 작품 Chozumaki는 뽀글뽀글. 숨을 참았다가 내어 쉬는 것처럼 유리 안의 물이 소용돌이치며 소리를 냈다. 옆에는 나호 카마다 작가의 작은 방울이 놓여있다. 류이치 사카모토가 병상에서 작은 방울을 곁에 두고 소리를 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책과 유리 작품, 방울 모두 <사카모토 야에카>의 일부로 일 층에 있던 것인데 잠시 옮겨졌다. 전에는 비어있었다는 뜻이다.
옆방의 주얼리들은 테드 뮬링 Ted muehling, 가브리엘 키스 gabriella kiss의 작품들이다. 유리장에 물방울이 맺힌 듯 걸려있는 귀걸이들. 한데 모여있는 계란을 닮은 촛대들. 창에서 보이는 옆집의 풍경은 동화처럼 아름다웠다. 어떤 사람이 살고 있을까, 정원은 누가 가꿀까, 나무는 몇 살 일까 하고 궁금해지는 풍경이다. 집이라기보단 식물원 속 온실처럼 인적 없이 고요했다.
도착한 날로부터 며칠간 비가 오다가 처음 해가 뜨던 날. 시간대에 따라 일층의 거실로 해가 들어 벽에 눈부신 그림자를 그려내고 이층의 주얼리 방에도 깊숙이 들어섰다. 일 자 모양의 선반 위로 흔들리던 빛과 그림자는 8일 중 단 한 번 목격했다. 사진으로 담을 새도 없이 흘러갔다.
손님들은 일층을 자유롭게 돌아보다가 이층으로 올라가 시간을 보내고, 다시 내려와 커피를 마셨다. 옷을 사거나 커피와 케이크를 먹거나, 월WOL 공예품을 사거나 ㅡ계산은 그곳을 떠날 때 한 번에 이루어지는 듯했는데 모두 작은 종이에 손으로 써내려졌다. 천천히 포장을 하고 손님이 나서는 문까지 따라나서서, 공손히 쇼핑백을 전하고 인사를 나누는 마무리. 그 모습이 마치 집에 초대한 손님을 배웅하는 것처럼 보였다. 특히 직원들의 나이가 20대부터 30대, 그 이상까지 다양했는데 그렇기에 손님도 젊은 사람부터 나이 든 사람까지 모두 편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처음 했다.
월WOL의 전시를 보러 어느 나이가 지긋한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방문했다. 할아버지는 다리가 아프신지 정원의 돌 의자에 앉아 잠시 쉬었다. 할머니는 피아노 앞에서 기웃기웃하며 구경했다. 나는 다가가서 번역기로 이렇게 전했다. '비가 세차게 오던 바로 다음 날, 건반 아래쪽 판이 떨어졌어요.' 할머니는 크게 놀라며 뒤쪽에서 다른 조각을 봤다고 손짓했다. 피아노의 옆 부분이 쪼개진 조각이었다. 할아버지에게 다가가 설명하는 할머니. 새가 지저귀는 소리,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어디선가 들어와 잠시 머무는 고양이.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그렇게 정원에서 쉬다가 다시 거실로 돌아와 해인요의 볼과 접시를 골랐다.
사진을 찍기 위해 조금 일찍 출근했던 일요일 아침. 정원에 물을 주고 있는 직원과 인사했다. 안에선 천천히 청소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쓱싹쓱싹. 서두르는 법 없이, 생략적으로 모든 게 펼쳐지던 곳. 갖추지 못한 것을 탓하지 말고 비워두는 방식을 알려주겠다고 말하는 듯한. 그곳에 월WOL이 잠시 자리했다. 열아홉 명의 작가분들과 리미 대표님&최 고문님, 지수 실장님의 등 뒤에 서서 겪은 모든 것들과 웃는 얼굴로 기억될 사람들을 하나하나 마음에 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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