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열매가 어둠을 밝히는 골목의 끝에 마지막 서점이 있었다. 이번 여행에서 내가 찾고 있던 단 한 권의 책이 있을 수도 있는 곳. 희귀한 아트북을 다루는 곳으로 지도를 펼치고 펼쳐서 발견했다. 여전히 동네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길을 찾고 호스텔 직원이 건네는 종이 지도가 닳도록 걸어 다니던 여행의 맛이 그리운 나는 아이폰에 코를 박고 다니는 걸 기피하려 했다. 그렇지만 어떻게 읽는지도 모르는 <百味菜々> 사진책을 살 수 있는 곳은 물어볼 수 밖에 없었다. 고베와 교토를 통틀어 6개의 헌책방을 뽑아주는, 생각 중이라면서 단 몇 초 만에 결과값을 내는 똑똑한 친구.
고베에서 3곳, 발품 팔아 발견한 4곳 더, 또 친구가 알려준 교토의 3곳을 모두 돌아봐도 없었다. 고베의 헌책방 주인들은 내가 내민 책 표지의 사진을 보곤 고개를 저었다. 음식과 관련된 책은 저쪽에 있다며 알려주는 사람도 있었다. 점점 가격은 둘째치고 실제로 만져보지도 못하고 가겠구나 하고 마음을 놓았던, 공항으로 떠나기 한 시간 전이었다.
드르륵 소리를 내며 어둡고 작은 가게로 들어갔다. 안에는 외국인 남자 손님이 책을 펼쳐 보고 있었다. 주인은 다소 굳은 표정으로 이곳은 어딘지 알고 왔니, 같은 뉘앙스의 문장을 말했다. 가기 전 몇몇 평을 읽었기 때문에 오히려 딱딱한 응대가 자연스럽다고 느꼈다. 그리고 나는 이 책을 찾고 있다며 사진을 내밀었다. 순간 주인의 얼굴이 눈 녹듯 사르르 부드러워졌다.
오 이 책을 찾고 있구나. 아주 좋은 책이지. 유명한 셰프와 포토그래퍼가 만든 책이야. 도쿄에 있던 식당인데 지금은 문을 닫았어. 루시 리의 그릇들에 음식을 담았지. 루시 리 알지? 오 알고 있구나. 아름답지. 지금 팔고 있는 건 없고 나는 한 권 소장하고 있어. 싸인이 담긴 책으로.
실제 살아있는 평을 들었다. 나는 물론 집에 있겠지? 라고 웃으며 되물었다. 집이 아니라 창고에 있다고 답하는 주인. 나는 - 싸인까지 담겨있다니 좋겠다. 라며 다른 책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뭔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곧 잠깐 보여주겠다며 있는지도 몰랐던 어느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곱게 비닐로 싸여있는 책을 들고 내려온다. 표지로만 보았던 35살 넘은 그 책이 내 손에 들어왔다. 조심스럽게 펼쳐보니 싸인이 되어있고 맨질맨질한 사진이 펼쳐진다. 물속에 찰랑거리는 야채들. 그릇에 담긴 요리들. 조리가 된 후에도 빛깔이 살아있다. 정적인 배경, 어딘가 야채의 선을 닮은 그릇들. 흐르는 느낌을 받았다. 맑고 투명하다는 느낌도. 단정하고 생략된 장면들.
선명한데 차갑지만은 않고 분명히 만져졌지만 자연스럽다.
소장하는 책을 선뜻 내밀어 준 친절이 고마워서 사진은 단 한 장도 찍지 못했다. 지금까지 6곳을 넘게 다녔지만 실물을 처음 보게 되어 고맙다는 말을 건넸다. 별거 아니라는 표정. 아마존에서 아마 구할 수 있을거라며 예상 가격까지 말해주는 사람. 속이 따뜻한 주인이었다. 위층에 있는 그의 컬렉션을 상상해 보았다. 아래층의 몇 배로 펼쳐져 있을, 세상에 하나뿐일 책들을.
고맙다는 말을 열 번 정도 내뱉을 즈음 가게를 나왔다. 예상보다 삼십분을 더 머물러 남은 길은 뛰어야 했다. 소장한다는 것과 파는 것 그리고 찾고 있는 사람과 실제를 한 번이라도 본다는 게 어떻게 다른 지가 줄줄이 떠올랐다. 생각이라는 건 직접 겪어본 후에 더 깊어지는 과정이라 시간이 걸리는 게 당연한 일이다. 간추리는 일 없이 책 한 권의 끝, 여행의 끝, 삶의 끝에 다다랐을 때 알게 되는 이야기가 더 많은 세상에 살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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