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가신 외할머니 꿈
말 없는 외할머니 옆,
언제나처럼 총기 가득한 눈동자로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외할아버지
뉴욕에 남은 시간동안 당신이 돌아다닐 곳을 지도에 표시하라고
여섯 시간
여행지에서 남은 시간 동안 마지막으로 볼 수 있는 곳이 어디인지
모든 게 자연스러운 듯
누리는 가족
꼭 인생을 두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내 몸으로 세상을 구경시켜 줄 시간
얼마나 남았어? 라고.
다 못 보고 가는 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마지막까지 반짝이는 호기심을 품은 채
핸드폰을 잃어버린 줄 알았던 순간 제일 먼저 메모장이 떠올랐다. 꿈에서 깨어난 어느 새벽, 버스정류장에서 내려 한 포스터를 마주했을 때, 중요한 일을 시작하고 마쳤을 때. 몇 자씩 적어놨던 그 조각들은 다시 흉내낼수도 없었다. 사진이야 소중한 것들은 모두 카메라로 찍었으니 곱게 저장해놨고. 손목에 무리가 가도록 들고 있던 핸드폰에 담긴 것 중 가장 아쉬운 건 글자들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일 년 전에 쓰던 핸드폰을 켜보니 사진을 빼고는 모든게 동시에 움직이고 있었다. 달력에 적어내려간 계획들도, 전화번호부, 메모장까지. 꿈 속의 외할아버지가 느껴지는 몇 줄부터 꺼내 읽었다.
우연히 들어간 동네 미술관에서 어릴 적 외할아버지댁에서 보았던 색들을 만났다. 여름이면 손톱에 물 들이던 봉숭아. 장롱에 쌓여있던 무거운 이불이나 외할머니가 겨울에 꺼내 입으시던 외투의 색. 특히 붉은 색들이 그렇다. 또 은행잎처럼 노오란 색이 그렇다. 모두 하나같이 따뜻한 색. 거기엔 젊었던 시절의 엄마 얼굴이 있다. 어렸던 엄마의 얼굴도 있다. 오래된 액자와 누가 처음 썼는지 모를 저금통. 나는 보물찾기 하듯 오래된 살림살이를 천천히 구경하곤 했다. 외할머니는 모든 것을 꺼내주었다. 숨기는 것 하나 없이 투명하게. 조심스럽지만 매우 가깝게.
가끔 총명한 외할아버지가 나의 세대에 살았다면 어땠을까 상상했다. 외할아버지가 보았을 영등포 거리도 떠올렸다. 적지 않게 뉴욕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지내서 그런지, 평소의 모든 생각이 섞여 온 가족이 함께 뉴욕을 여행하는 꿈을 꾸었던 어느 밤. 외할아버지라면 뉴욕에 떨어져도 성실하고 생활력 있게 잘 살아가지 않았을까 하면서 메모장에 몇 자 적어놓고 다시 잠들었던 새벽. 멋진 모자를 쓰고 영어를 쓰는 나라에서도 익숙한 듯 차분한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를 보았던 날.
모든 이사 준비를 마쳤지만 가까이 살고 싶다는 어머니 말씀에 서울로 떠나지 못했다는
외할아버지의 젊은 날, 엄마의 어린 시절이
어떤 색채를 내게 남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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