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어코 쌀을 씻는 밤

 


집에 오는 길이 너무 길어 지쳐도 
일부러 혜화역에 내려 
혜화로터리에서 시작되는 길을 걷는 날이 있다. 

책이 필요한 날에는 동양서림에 들러 마음껏 책을 고르고 과일이 필요한 날에는 작은 과일가게를 기웃거린다. 유난히 사람이 많은 카페 겸 와인바에 여전히 사람이 많음을 확인하고 혜화초등학교를 지난다. 올림픽스포츠센터부터 시작되는 언덕길. 입학시험이 치러지던 어느 날, 곧 학생들이 나오는지 그 앞을 가득 메운 학부모들의 뒷모습을 보다가 눈물이 날 뻔했던 과학고등학교는 언제나 고요하다.

잘 자란 은행나무들을 지나 돈까스집 두 곳이 나오기까지 숨이 차도록 오르면 저멀리 반짝이는 성곽이 보이기 시작한다. 내리막길을 걸으면 내가 성북동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소인 성북초등학교 앞 길목이 보인다. 저 멀리 서울 성곽이 하늘까지 펼쳐지고 바로 앞에는 오래된 화덕피자집 모짜, 커피가 맛있는 카페 일상이 있다. 모퉁이를 돌아 언제나 공연이 열리는 째즈스토리를 지난다. 그 길 건너 경찰서를 보면 어딘가 안심이 된다. 안전한 마을에 도착한 기분이 든다.

그렇게 먼 길을 돌아 겨우 집에 도착했음에도 기어코 쌀을 씻게되는 밤이 있다. 쌀을 뽀드득 씻어 불리는 동안 샤워를 하며 몸을 푼다. 솥을 불에 올려 끓어 오르기를 기다리다 보글보글 넘치기 전 불을 약하게 줄이기까지. 꽤 시간이 걸리지만 이제 거의 완성이라는걸 안다. 곧 모락모락 김이 나고 밥 짓는 냄새가 퍼지면 마음이 놓인다. 하루종일 괜찮지 않았더라도 이렇게 마무리할 수 있음에 '다 괜찮다.'

마땅한 반찬이 없어도 괜찮다. 냉동실에 아껴두었던 보리굴비를 꺼내 데우고 따뜻한 녹차를 함께 준비하거나, 구운 명란을 넣어 손으로 뭉치고 그걸 또 팬에 굽다가 간장 소스를 바르기도 한다. 또 어떤 날은 고기를 굽고 상추를 씻는다. 양파를 썰어 조물조물 먹기 좋게 곁들이고 양배추를 찌고..

밤 아홉시가 넘어 완성된 밥상에 앉아 술을 한 잔 따른다. 하루 중 열시간을 밖에서 맴돌다 비로소 마음을 편히 두는 자리다. 갓 지은 밥과 함께 마음을 살살 풀어 헤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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