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정하는 카메라의 한쪽 다이얼이 몇 달째 말썽이다. 튼튼한 자리하나 마련해 주지 못하고 가죽으로 된 흐느적한 가방에 편하게 들고다니다 탈이 난 모양이다. 거기에 더해 제주 여행을 위해 잠시 빌린 렌즈까지 내 손으로 고장 내고 말았다. 삼 년 전 즈음 단단히 마음먹고 카메라를 하나 장만하려 했을 때, 캐논일지 후지필름일지 혼자 고민할 때- 직접 내 손으로 카메라를 만져보도록 도와준 고마운 분의 렌즈를 고장낸 것이다. 마침내 압구정로데오역 앞에 있는 아이들의 병원을 찾기로 한다.
카메라를 사고 햇빛에 의존해 사진을 찍다 조명이 궁금해지고 조명의 액세서리들이 또 알고 싶어지고, 카메라의 렌즈들에 손이 갈 때. 질문하고 또 진실된 조언을 받을 수 있었던 고마운 몇몇 분을 만나왔다. 진지한 마음으로 질문하지만 결국은 내 마음대로, 내 멋대로 결정하면서 미안한 감정을 느끼기도 했다. 전문가의 입장에서 바라봤을 때 나의 행동들이 얼마나 바보처럼 느껴졌을지 충분히 알고 있다. 그럴 때마다 항상 너그럽게 나를 바라봐 준 사람이 있다.
흐린 어느 토요일 아침. 그분의 렌즈를 후지필름 as센터에 맡겼다. 걸어서 3분 거리에 있는 식당에서 지난 1월부터 미뤄온 자리를 갖기로 했다. 올해 1월 24일부터 일하고 있는 지금의 회사를 소개해 주고 일할 수 있도록 힘을 북돋아주어 감사함을 전하는 자리였다.
막 취업하고 갖는 자리와는 조금 다르게 흘러갈 수밖에 없었다. 처음 이 일을 하고 싶다는 마음을 가졌을 때를 애써 떠올려보는 요즘이기 때문에 더 그랬다. 무엇에 반했을까. 어떤 사람을 보고 저 사람처럼 되고 싶다고 생각했을까. 늦은 나이에 전공도 아닌 일을 겁도 없이 시작했을까. 혼자 되돌아보던 말들을 꺼냈다. 처음 우리가 꿈에 빠졌던 기억들을 상기시켜 어쩌다 마주한 상처들을 회복시킬 수 있다면 좋겠다는 심정으로.
정식당에서 먹은 음식들은 모두 분명했다. 김부각에 잘 싸진 김밥은 한입 베어 물자마자 '고소함'을, 참치 위에 뿌려진 시소나 샤베트에 올려진 사랑초에서는 '싱그러움'을 느꼈다. 돌문어와 송이버섯은 그릇에 코를 박는 느낌으로 먹고 말았다. 처음 내어준 샴페인부터 총 세잔의 와인은 전체 식사의 반을 차지할 만큼 감동했다. 작은 자개 스푼은 아무리 그릇에 닿더라도 고운 소리를 내고 직접 고른 색의 나이프에는 고기가 쉽게 썰렸다. 모든 것이 분명하고 진하게 우러나 더할 것 없는 시간이었다.
렌즈가 모두 고쳐졌다는 전화를 받았다. 두시간 반동안 이어진 식사를 급하게 마무리했다. 그분의 렌즈를 찾고 나의 카메라를 맡겼다. 주말 동안 카메라가 곁에 없다는 사실에 벌써부터 허전함을 느꼈다.
어느 겨울 파주의 한 스튜디오에서 만났던 커다란 카메라와 잘 차려진 테이블, 그리고 교보문고 외국서적의 구석에서 발견한 heidi swanson의 near&far 책을 언제나 떠올린다. 매일 곁에 두고 애정하는 카메라와 음식들, 그릇과 작은 스푼까지도. 처음부터 그려왔던 그림들을 마음에 새긴다.
참새, 정원
출장으로 제주에서 일주일 동안 머물기 전 하루의 시간을 내 탈로제주를 찾았다. 단 하루라도 이곳에 머물고 싶었던 단순한 이유는 '북유럽 조명과 의자에 둘러싸여보고 싶어서' 였다. 배낭여행 중 찾았던 코펜하겐 디자인 박물관보다 재밌었던 건 멋지고 편한 것들을 직접 쓰고 있던 평범한 집을 방문했을 때다. 더 나아가 하루 동안 머물며 모두가 사랑하는 의자와 테이블, 조명을 직접 써본다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들이 오랜 세월 사랑받는 이유를 나는 써보지 않고는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탈로제주에 가까워질수록 차분한 동네에 안착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주차를 위해 바로 옆 마을회관에 처음 내렸을 때 의젓해보이는 나무와 뉘엿뉘엿 저무는 해를 보았다. 큼직한 집들이 커다란 정원을 품고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연보라색 예쁜 문의 이웃집을 지나 담장이 낮아 집 안이 훤히 보이고 마찬가지로 낮고 소탈한 대문을 열고 탈로제주에 들어섰다. 마당 안 훤칠하게 서있는 나무에서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참새들이 합창하며 우릴 반겼다. 주변은 사람 하나 없이 조용했다.
첫인상으로 가장 놀랐던 건 넓은 마당이었다. 예약을 하기 전과 후로 일부러 사진을 찾아보지 않았기에 집보다 넓은 마당이 앞,뒤로 있을 줄은 몰랐다. 언뜻 집 안은 네 명이 살더라도 그 주변의 마당에서는 서른 명이 잔치를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참새 소리를 뒤로하고 비밀번호를 눌러 집 안으로 들어섰다. 오래된 집은 내부를 새롭게 고치면서 옛 모습이 거의 사라졌지만 첫 발을 내딛는 툇마루만은 그대로였다. 올리브그린의 타일에 신발을 곱게 벗어놓았다.
'실례합니다.'
풍요롭고 낮은 집
그래서 나는 북유럽을 흠뻑 느꼈을까. 만든 사람의 이름도, 만들어진 연도도 돌아서면 잊히는 의자에 실컷 앉아보고 조명 아래서 시집을 읽고 와인도 마셔보았다. 갖고 싶었던 물결치는 화병을 가까이서 만져보고 아라비아 핀란드 찻잔도 꺼내 써봤다. 실용적이고 아름다운 것들에 둘러싸여 그 쓰임을 알았다. 그렇지만 돌아보니 더 좋았던 것은 따로 있었다.
넓은 정원 덕분에 주변의 집들과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는 점, 그래서 자유로웠다는 점
두 개의 방과 주방, 통로, 화장실까지도 내어진 창 덕분에 트이는 숨통
-큰 창으로 자꾸만 멀찍이 찾게 되는 한라산 풍경, 큰 방에서 보이던 비행기, 테이블과 바닥에 서서히 들어서던 아침 햇빛, 창밖에서 날 쳐다보던 참새
천장이 낮은 작은방의 안락함, 거실의 의자에서 시집을 술술 읽던 저녁, 천장이 높은 큰 방에서 영화를 보던 늦은 밤, 천천히 내린 커피가 반짝이던 아침
야무지게 영근 무화과와 열매들을 구경하던 아침 산책.
뒷마당에서, 담장 밖에서 바라보는 주방의 창문이 특히 좋았다. 어딘가 낮게 깔린 듯 고요한 집의 뒷모습에 이처럼 넓은 정원이 있어 마음이 편안했다. 문득 이렇게 낮은 담장과 쉽게 열리는 대문이 많은 동네에서 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창문을 커튼으로 꽁꽁 가리고 겨우 주차장 한 칸을 여유로 갖는 집에서는 느낄 수 없는 넉넉함으로 가득할 마음이 궁금해졌다.
blue blue, sky-blue
어떤 색감에 반하게 되는 경험은 다양하다. 파랑의 코트를 우연히 걸치게 된 스물다섯의 나는 그 이후로 파랑에 더 눈길을 건네고 피렌체 여행에 다녀오고는 빛바랜 장미와 물기 머금은 그린의 조화를 자주 떠올리기도 했다. 어떤 해에는 무화과 색에 끌리기도 하고 어느 날 갑자기 쳐다보지도 않던 빨강에 손이 가기도 한다. 그렇게 크거나 작은 혹은 아무 이유 없이도 색감에 마음을 내어주게 될 때가 있다.
탈로제주에서 하루 동안 머물면서 재밌는 상상을 했다. 어떤 어린아이가 이곳에서 하루를 머물게 된다면 그날부터 하늘색을 다르게 기억할 것이다,라고. 조명, 찻잔, 그릇, 때에 따라 지붕과 그에 맞닿는 하늘까지도- 곳곳에 빛바랜 하늘색이 자리하고 있었다. 돌아보니 나는 그와 비슷한 색의 어떤 것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나와 가깝지 않았던 하늘색을 처음 손으로 만지고 들여다보았다.
물론 이곳에 하늘색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와 절묘하게 어울리는 크림 옐로우, 포근한 그린의 카페트 그리고 하이라이트라고 느껴졌던 푸른 타일까지. 오래 바라보게 되는 조명들과 은은한 햇빛 아래서 특별한 색을 내뿜고 있었다. 그럼에도 맑고 차분한 하늘색을 볼 때면 탈로제주를 떠올릴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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