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겨울다운 추위가 시작된 어느 금요일
나는 두번째로 가 본 동네를 막 떠나 익숙한 고속터미널역에 내리던 참이었다. 눈이 시렵도록 차가워진 날씨에 유난히 공기는 맑았고 도시 전체가 반짝였다.
'황금빛 햇살이 꿈처럼 반짝인다.' 아침부터 읊조린 혼잣말이 자꾸만 머릿 속을 맴돌았다. 난 거의 한 달동안 연달아 좋은 꿈을 꿔왔다. 그 날의 기분마저 '쨍했다'고 할 수 있는데, 겨울의 공기 속 햇빛만큼 꾸밈없이 맑고 선명했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어느 면접을 떠올렸다. 서른살이었다. 아르바이트에서 만난 인연으로 ‘같이 일해볼래?’라는- 내 인생 두번째 실장님의 한 마디에 이끌려 생전 처음 보는 동네에 용기있게 발을 내딛었다. 면접 전 추위를 피해 잠시 들른 카페에서 남겨둔 사진 하나가 머릿속에 남아있다. 직접 만든 파란 천가방을 찍은 사진이었는데 아마 그게 내가 마지막으로 실과 천으로 만든 무언가였다. 새로 반해버린 일- 테이블 위를 보기 좋게 담는 일은 그렇게 시작되었고 동시에 실장님의 딸과 강아지의 밥까지 챙겨야하는, 신데렐라의 어린 시절 같은 몇개월이 펼쳐졌다.
“찾아봤냐~?”
제주도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지나가다 본 강아지 모자를 인터넷으로 찾아봐달라고 몇 주 째 걸려오는 전화였다.
“아빠 나 오늘 면접봤어요. 근데 좀 멀어서 어떡하지?”
“그랬냐~? 행운을 빈다~!”
보통의 이야기는 생략된 채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행운을 빈다. 잘해봐라.
마을 버스를 타고 몇 정거장 이동하기 전에 통화는 끝이 났다.
“괜찮아. 살다보면 다 하게 되어있어.”
며칠전 엄마에게 주절 주절 늘어놓은 나의 말들이 한 마디로 정리되던 통화와 닮아있었다. 속이 시원해지는 지난 꿈들이 떠올랐다. 엄마는 인생은 한 번이라는 말도 했다.
“그냥 각자 다 하고 싶은대로 사는거야.”
의류학도일적 존경하는 마음에 직접 찾아가 인터뷰까지 했던 어느 디자이너의 패밀리세일 장소에 내려 진한 블랙의 윤기가 좋은 코트를 하나 샀다. 좋은 코트를 만난 건 기억에 남을만큼 오랜만이었다. 묵직한 코트를 들고 곧 도착할 오븐을 맞이하러 집으로 향했다. 지하철 역으로 내려가기 전 마주한 건물에 파란 하늘이 물결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겨울이 그래서 좋다. 차가운 공기에 정신은 맑아지고 많은 것들이 간단해진다.
단단한 코트를 갖춰입고 새로운 길로 나설 수 있는 용기, 겨울의 빛과 닮았다.
입김을 뿜어내며 언덕을 올라올 때 저멀리 오븐을 실은 트럭이 보였다.
먼저 문을 열고 맞이하기 위해 기꺼이 언덕을 뛰어올랐다.
틀 FRAME
한 칸, 한 평, 나 만의 절대공간
JJ중정갤러리
/박찬우 개인전
정겨운 개나리가 담을 따라 멋지게 늘어져있던 동네의 어느 주택도 얼마전 빈 집이 되었다.
아마도 이방인인 나는 모를 이야기가 부지런히 펼쳐지고 있는 듯한 성북동에는 오래된 나무와 집들이 하나둘 허물어지고 똑같이 생긴 신축 빌라들이 지어지고 있다. 그런 집을 보러 간 적이 있는데 놀랍게도 내부까지 모두 닮아있었다. 마치 같은 건축업자가 지은 것 처럼.
지난 봄에 사라진 집 앞 은행나무 두 그루가 더욱 그리운 가을이었다. 까치가 우는 소리 대신 들리는 공사 소음을 견디느라 창문 한번 시원하게 열어두지 못했다. 어쩌면 이 동네를 미련없이 떠날 수 있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럼 어디로 갈 것인가? 갈 곳이 없다는걸 알면서도 저녁마다 '건축탐구 집'을 찾아보며 환기한다. 바람이 잘 통하고 자연과 가까운 집. 은퇴 후 찾아가는 이상의 집들과 성북동은 반대로 가고 있다. 물론 저 먼 높은 곳의 성북동은 변화없이 고요하다.
연차를 낸 평일 아침, 전시에 대한 아주 짧은 내용만 읽고 단숨에 이끌려 중정갤러리에 다녀왔다.
평창동 골목 끝에 있는 갤러리는 걸어 올라가는 길부터 전시의 시작처럼 느껴졌다. 멀리 보이는 큰 창을 바라보는 순간 안의 공간이 펼쳐지는 느낌. 나무를, 붉은 벽돌의 지붕을, 저 멀리 산을 한 폭에 담은 창문은 딱 그곳에 어울렸다. 시원하게 펼쳐질 한 쪽의 창문은 더욱 근사했다.
작가는 숲, 바다, 들판, 도시에 놓인 한 평의 흰 박스를 멀리서 담아냈다. 흰 박스는 정육면체로 보이기도 했지만 한 쪽이 뚫린 모습을 보여주기도, 마지막으로는 두 면을 열어 바다를 바라보는 장면을 담기도 했다. 처음에는 그 한 평의 작은 공간이 인간이 소유한 집처럼 보였고 편히 쉴 방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바다를 바라보는 장면에서 결국 내면에서 밖을 바라보는 시선, 마음가짐, 상태로 보이기 시작했다. 한 평의 마음에서 바라보는 무한대의 수평선- 곧 무한한 마음에서 그려지는 무한한 힘.
한 평의 둥근 샘물 위, 길게 매달린 돌이 시계 추처럼 움직였다.
놀랍도록 잔잔한 파장이 가끔 나타나 한 평 전체로 퍼졌다, 다시 사라졌다.
거의 움직이지 않다시피 움직이는 제 속도의 돌을 바라보며 알 수 없는 이유로 편안함을 느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