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에서야 처음으로 서서 일하지 않았다. 쉬는 날도 곳곳에 있었지만 5월은 참 길었다. 퇴근길 발목에 힘이 남아 몇 달만에 두시간정도 산책했다. 을지로 3가에서 시작해 청계천을 따라 종로 3가를 만나고 서순라길을 지나 율곡터널을 건너 창경궁 돌담을 걸었다. 운동화도 아닌 납작한 가죽 슬리퍼를 신고 발바닥이 얼얼해지도록. 혜화 로터리를 넘어 동네에 도착하기까지 들어서는 길모퉁이마다 기분 좋은 바람이 불었다.
제주 출장에 다녀온 이후로 읽던 책을 한참 이어가지 못했다. 일부러 술은 피하고 일기도 쓰지 않았다. 머리카락을 짧게 자르고 낮잠을 세시간씩 잤다. 바스락거리는 이불에 누워 창문으로 솔솔 불어오는 바람이 느껴지면 바로 잠들었다. 그렇게 두번의 주말을 보냈다. 지난 일요일에는 비가 내려 어둡기까지 해서 아무 생각 없이 자기에 딱 좋았다. 자고 일어나면 조용한 영화를 틀어놓고 주변을 조금씩 치웠다. 유난히 여러 목소리를 들어 볼 기회가 많았던 터라 혼자 있을 때는 침묵했다.
그렇게 회복하는 데 충분한 시간을 보내고 오랜만에 와인을 꺼냈다. 얇은 유리 잔에 든 차가운 와인이 곧 송글송글, 불투명해졌다. 수박과 함께 그리고 직접 구운 바닐라 쿠키와 함께 여름을 잘 부탁한다는 의미로 딱 한 잔씩 나눠 마셨다.
어쩌면 1월에 마침표를 찍었을 이야기에 천사같은 사람이 나타나 작은 기쁨을 주어 5월까지 달릴 수 있었다. 일 년을 넷으로 나누거나 반으로 나누는 것은 나에게 별 의미가 없지만, 12분의 1이었던 것을 2분의 1까지 채운 것은 큰 의미가 있다. 사실 봄에는 퇴사라는 단어를 거의 잊고 지냈다. 그저 주어진 일에만 집중했다. 아무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모두의 바람이 하나로 모아질 수 있도록.
그 과정에서 만난 아픈 구석들을 모두 '배운 점'이라고 포장할 순 없겠다. 좋은 말로 문제를 덮어버리거나 포장하는 건 순간은 괜찮을 수 있다. 그렇지만 진짜로 원하는 것에서는 점점 멀어진다는 걸 알았다. 점점 멀어진다는 건 단순히 거리만으로 이야기할 수 없고 쌓이는 시간과 어루만질 수 없는 감정이 풀지 못하도록 뒤엉키는 모습과 같다. 놀랍게도 많은 사람들이 솔직해지는 것보다는 멀어지는 편을 택한다. 영원히 작별하는 것처럼.
5월을 하루 앞 둔 오늘에서야 마음을 가다듬는다. 어떤 여름이 펼쳐져도 이상할 것이 없다. 그저 원하는 쪽을 멀리 바라보며 가뿐히 걸어갈 뿐이다.
길모퉁이를 돌 듯, 계절이 바뀌듯.